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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13월의 문 | PART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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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 이 세계조차 죽어가는 마당에, 운명 따위 존재할 리 없다고 믿었다. 어린 날의 퀴아나 랭커스터는 세계를 원망했다. 멸망을 앞둔 세계에서 태어나다니, 이미 죽은 목숨이나 다름 없지 않은가? 하지만 모두에게 그러하듯, ‘악을 쓰고 발버둥을 쳐봐야’ 달라지는 것 없었다. 바야흐로 맞이한 일곱 번째 봄날, 퀴아나는 포기했다. 운명에 어떤 의미도 두지 않겠다며 다짐했다. 마법 세계에 대대로 뿌리 내린 랭커스터 집안의 의견은 제각기 달랐다. 퀴아나의 아버지는 예언의 목도를 한평생 기다렸다고 한다. 퀴아나 앞으로 호그와트 입학장이 도착했을 때 그는 말했다. ‘아아, 드디어.’ 어머니는 예언을 한평생 두려워했다. 퀴아나보다 조금 이른 ‘탄생과 죽음의 세대’로 태어난 남매는 예언을 무시했다. 나는 운명을 믿지 않아. 운명이 존재한다면, 우리에게 너무 가혹하잖니. 01 누군가는 물었다. 호그와트는 왜 이런 세대를 받아 가르치는 건가요? 누군가가 답했다. 세계가 혼란스러우니까, 호그와트라도 나서는 것 아니겠어요? 한 세대를 둘러싼 모든 이야기에 일절 관심 없는 신입생이 기어코 연회장에 도착했다. 매년 신입생의 수가 줄어든다더니, 과연 그랬다. 한때 연회장을 가득 채우고도 남았을 텐데, 지금은 군데군데 빈 자리가 남는다. 남은 자리를 재학생이 채우고 나서야 입학식이 진행됐다. 02 “지금부터 기숙사 배정을 시작하겠습니다.” 그 말을 시작으로 한 명씩 앞으로 나가 머리 위에 모자를 눌러 얹고 저마다의 기숙사로 향했다. 마음 같아서는 턱을 괴고 멀뚱하게 바라보고 싶었지만, 몸에 익은 버릇은 어디 가지 않았다.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바라보고 있는데, 그때. “얘.” “…….” “얘!” “……날 부른 거니?” 옆자리에서 소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실패한 첫 번째 부름이 무안한지 시선을 휙, 돌리는 소녀가 있다. 자신에게 건 말인 줄 몰랐다는 작은 변명도 퀴아나는 굳이 붙이지 않았다. 포기했다는 것은 세계와 스스로의 미래를 포함해 모든 관계를 일찍이 단절했다는 뜻이었다. 호의도, 적의마저도 큰 의미가 담기지 못하는 터라─또는 변덕이 들끓어서─ 같은 신입생 소녀, 에스더에게 가볍게 눈짓했다. ‘왜?’ 마주 소근거렸다. “너는 어떤 기숙사에 가고 싶니?” “그렇게 묻는 너야말로 이미 정해둔 기숙사가 있나 싶은데.” “그, 그건……. 내가 먼저 물어봤거든.” 얘 봐, 뺨이 붉어졌잖아. 시답잖은 생각이 흘러갔다. 지루한 입학식 보다 옆자리 입학생을 지켜보는 것이 더 즐거웠다. 에스더가 표정 정돈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덧붙였다. “별로. 생각 없단다. 어디든 들어가겠지.” “김 새는 대답이야.” 진심인데도. 관상적으로 웃었다. 에스더에게서 시선을 빗겨내면 저마다의 기숙사로 향하는 입학생들이 보인다. 두 사람의 차례가 머지 않았을 것이다. 때마침 에스더의 이름이 불렸다. 짧은 대화가 마무리되어야 하는 시점에서, 퀴아나가 속삭였다. “굳이 한곳을 골라야 만족스럽겠다면.” “……응?” “네가 지금 배정받을 그 기숙사인 것으로 해둘까.” 03 운명이라는 것은 분명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왜 소설 속에도 자주 등장하는 문구가 있지 않은가. 그것은 곧잘 사랑에 온갖 시각적 효과를 누리며 낭만적으로 다가온다. 예를 들면 달이 커 보인다거나 시간이 멈춘 것처럼 모든 게 천천히 움직이고 때마침 주변에 있는 시계탑에서 종이 울리면서 비둘기는 깃털을 떨어뜨리는 줄글들. 어렸을 때부터 그러한 책들을 자주 읽은 것은 맞지만 그것들을 동경해서 꿈에 부푼 이야기냐고 묻는다면, 그것보다는 좀 더 현실적인 자각이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단순히 꿈이나 소설의 이야기는 아니라는 거다. 주변에 망토 입은 사람 아무나 붙잡고 물어도 ‘운명’이라는 것의 믿음은 곧잘 이해받고 공감하는 것일 테다. 말하긴 그렇지만 머글-요즘은 비마법사라고 굳이 명칭을 정정하는 움직임이 보이지만-들 보다도 마법사들은 운명을 사랑한다. 이 세계는 마법이 존재하고 있으니까. 다만 이 세계에 있는 모두가 마법이라는 것을 지극히 인간적인 영역이나 사람이 이뤄낸 기적의 산물이라고 여기지는 않는다. 더 위대한 절대자에 의한 신탁과 사명이라는 겸손하고, 동시에 오만한 축복으로 말할 수 있었다. 이 땅, 이 대륙, 이 모든 대지가 인간의 손에 떨어진 지 몇천 년이 지났음에도 세상의 주인은 따로 있다는 주장. 그러니 우리는 수정 구슬과 찻잔에 남은 찻잎 찌꺼기를 보면서 예언을 귀담아들어 삶의 형태를 정하는 것이라고……. 종교에 심취하지 않아도 몇 가지 행위들은 대중적인 하나의 지표처럼 남아있었다. 시대가 변해 그것들이 고리타분한 옛 가치라고 떠드는 선구자들조차 시뻘겋게 눈을 뜨며 호소하는 예언가의 말은 도저히 흘려듣기 겁이 나지 않던가. 우리는 마법부 지하 깊숙하게 숨겨져 있는 예언의 방의 보관 가치를 안다. 검은 개의 형상을 두려워하고, 갑작스럽게 떨어지는 별의 궤도를 불길해하며, 한 달에 두 번이나 뜨는 보름달의 위상을 보며 소름끼쳐한다. 결국 같은 이야기야. 난 그 모든 것을 운명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저 보면 아는 것들. 순응하는 것들. 납득해 버리는 것들. 책 속 주인공들이 작 내의 장치대로 이동하는 것처럼. 무대 위 배우들이 소품을 꺼내는 것처럼. 우리는 극 중 극에 매료되면서도 배우로서의 장치를 밟아가는 것이며, 운명은 하나의 분기점인 거라고. 그러니 감히 말한다. 너를 만난 게 내 운명인 거야. 첫눈에 알았으니까. 04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안 들어.’ 에스더 엘드릿지는 언짢은 티를 내며 초상화 복도를 지나가고 있었다. 수업이 시작한 지 벌써 5분이 넘은 시간. 수업을 빼먹는 불량 학생이나 선택 과목을 들으며 한가롭게 시간을 때우는 6, 7학년 학생들이 아니라면 이 시간에 나와 있는 학생은 지각한 이들뿐일 것이다. 실제로 초상화들은 학기 시작하고 얼마나 됐다고 지각하는 학생이 속출하며 수군거리고 있었다. 에스더가 지팡이를 꺼내 신경질적으로 안대마법을 걸며 위협하자, 그림 속 사람들은 그와 멀어지기 일쑤였다. 치우쳐진 그림들의 균형이 깨져간다. 배경만 남은 그 모습을 보고 그나마 화풀이가 됐는지 아까보다는 차분한 걸음으로 마저 걸어나갔다. ‘이게 다 그 녀석 때문이야.’ 분명 그렇게까지 강조했는데. 아침은 같이 하고 1교시 수업을 함께 들어가자고 말이다. 에스더는 퀴아나를 생각하며 다시금 화가 나기 시작했다. 사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이 에스더 엘드릿지가 호그와트에 입학하고서 기분이 좋을 때가 손에 꼽혔다. 래번클로에 가라고 하던 모자와 싸워 그렇게 원하던 슬리데린에 들어왔을 때가 그야말로 가장 환히 웃은 날이 아니었을까. 뭐, 그 후로는 전부 하락세. 가족들에게 편지를 써서 자랑해 봤지만 잘 됐다거나 자랑스럽다는 문구는 찾아볼 수도 없는 답장이 온 데다 그렇게 존경해 마지않은 할머니는 편지조차 하지 않았다. 그래, 속상하지만 그건 괜찮았다. 어차피 가족들에게 있어 엘드릿지라면 비단 슬리데린에 가는 것이라고 하나의 공식처럼 받아들이고 있었으니 호들갑 떨 일도 아니었고 학기 초이기 때문에 자신이 잘한다는 것을 증명할 방도도 없었으니 칭찬받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별로 기대도 안 했고. 애초에 저물어가는 세대. 노력과 꿈이라는 단어가 미래를 상징하지 않게 됐다는 것쯤, 에스더는 어려서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건 참을 수 있어. 이미 예상하던 일에 속상하다는 것은 일말의 기대 때문이지 않은가?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다. 에스더가 그리던 마법학교 생활이라는 것은, 좋은 학우와 마법을 배우고 멋진 기숙생활을 하는 것에 있었다. 지식은 비단 쓸모없는 것이며 종이에 빼곡히 잉크를 적셔도 읽을 이가 남아있지 않으면 무용지물인 것은 모두가 알았다. 세계는 저물어갔지만 에스더는 그 안에서 최고라고 기억되는 마지막을 장식할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렇기 때문에 룸메이트는 중요했다. 그리고 그 중요한 룸메이트라는 아이와 하루도 잘 지내볼 날이 없었던 건 정말 크나큰 문제가 아니었나. ‘처음엔 느낌이 좋았는데…….’ 그와 만났던 첫 순간을 떠올랐지만, 회상이라 그런가, 조금 더 낭만적인 감성이 일렁였던 것도 같다. 그게 다 무슨 소용이냐만은. 15분을 늦게 도착한 교실은 사각거리는 깃펜의 펜촉 마찰음만 들릴 뿐이었다. 거의 모든 아이들의 시선과 교수의 턱짓이 에스더를 향했지만, 룸메이트-퀴아나의 시선만이 에스더와 동떨어져 있었다. 에스더는 퀴아나를 쳐다봤다. 여전히 그는 자신의 할일에만 관심 있는 것 같았다. 에스더가 남은 자리를 찾아 앉을 때까지 교수는 특별히 무어라 하는 말은 없었다. 출석이라는 것이 큰 의미는 없었다는 것을 교실 안의 모두가 알았다. 그가 앉은 자리에서는 퀴아나가 잘 보였다. 한 번을 돌아보지 않은 그가 속상했지만 어떻게든 들어온 수업. 펜을 잡았다. 05 수업이 끝난 뒤에야 퀴아나는 에스더를 뒤돌아봤다. “미리 말하지만, 그렇게 노려본다고 해서 네 지각이 내 탓이 되는 건 아니지 않니? 그만 좀 보도록 해. 수업 시간 내내 시선 때문에 집중이 안 되더라.” “적어도 네가 어제 했던 말을 조금이라도 기억했으면 이것보단 좀 나았겠지. 그런데도 네 탓이 아니라고 할 수가 있어?” “말이 안 통하는구나. 네 일방적인 말을 내가 지켜야 된다는 생각은 왜 하는 거니?” 이해가 안 되는 건 이쪽이라며 에스더는 큰 소리를 냈다. 매번 같은 레파토리로 싸우는 게 지겹지도 않은지 말싸움하는 두 사람은 어느 덧 교실에 남아있는 마지막 아이들이 되었다. 노골적으로 인상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막상 자리에 가만히 앉아있는 퀴아나의 태도가 의아했다. 어차피 결벽적인 퀴아나 랭커스터였으니, 다른 아이들과 망토자락 스치기도 싫어서 그들이 빠져나갈 때까지 기다리겠거니 싶었지만. 에스더는 기본적으로 퀴아나가 타인과 엮이는 것을 넘어 혐오하는 기류를 품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럼 사람들이 전부 없어진 지금이면 나가면 그만 아니던가. 에스더처럼 싸움에 집중하다가 나갈 생각을 잊어버린 것도 아닐 테고. 그를 신경 쓰던 에스더는 더 이상 퀴아나한테 휘둘려지는 것이 싫어 “흥.” 소리를 노골적으로 내며 고개를 돌렸다. 필기구를 정리하고 책을 덮고는 책가름끈을 묶어내는데, 그제야 퀴아나가 케인을 짚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퀴아나를 바라볼까 싶으면 퀴아나는 다시금 무심한 시선으로 다른 곳을 보고 있었고 에스더는 곧바로 제 책을 집어들고 반대로 시선을 돌려버렸다. ‘뭐야, 이 타이밍은……. 꼭 기다려준 것처럼.’ 저 퀴아나 랭커스터가? 말도 안 돼. 오늘 아침에는 안 기다려줬잖아. 애초에 저 세상 혼자 살 것 같은 애가 그렇게 신경 써달라고 호소할 땐 귓등으로도 안 듣더니 무슨 바람이 불었다고. 하지만 기대가 아예 없다고 한다면 그건 별개의 이야기였다. 에스더는 일어나지 않고 뜸을 들이며 느릿하게 행동했다. 유치한 핑계와 떠보는 어줍은 태도, 눈치가 아예 없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 얄팍한 수가 안 보일리가 없는데도 늦장부리는 이상한 행동을 했다. 일거수일투족에 기대하고 반응살피면서 감정이 오락가락하는 것이 스스로도 기분이 묘했다. 에스더는 그래도 힐끗거리며 퀴아나의 동선을 좇는 것을 그만두지 못했다. 처음 느릿하게 기다려주나 싶더니 퀴아나는 결국 짜증난다는 듯 케인 끝으로 바닥을 툭툭, 치면서 눈치를 주기 시작했다. 에스더가 책을 챙겨 걸음하고, 두 사람이 빈 교실을 나갈 때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거리가 좀처럼 멀어지는 것은 없었다. 06 모든 것은 스스로 재단해서 빠르게 결론 내는 것이 속 편한 것임을 안다. 세상도 그랬잖아.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멋대로 끝을 예고하고 단절시켰는데 사람이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이 있던가. 그러니까 관계도 그런 게 나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부질 없는 일이라고. 오히려 달려들고 부딪히는 게 이상한 거라고. 사실은 생각하는데, 에스더는 첫날에 느꼈던 감각을 도저히 떨쳐낼 수가 없었다. 아침까지만 해도 그날 느꼈던 운명적인 직감이 망상과 낭만으로 칠갑된 것일 거라고 단정하며 화냈던 게 거짓말인 것처럼 또 다시 철회해버리고 퀴아나와 나란히 걸었다. “넌 맨날 나한테 변덕스럽다고 했지만 너만큼은 아닐 거야.” 퀴아나는 반쯤 감긴 눈을 느릿하게 굴려 에스더를 흘겨봤다. 표정이 꼭 ‘내가? 웃기는 소리.’ 라고 핀잔하는 것 같았다. 저 녀석의 저 사람 무시하는 표정이 에스더는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이 시간만큼은 그것을 용서한다. 코너를 돌아 나선형 계단이 이어지는 외곽 탑을 따라 계산을 걷고 있노라면 퀴아나가 케인을 다시 세게 짚으며 멈춰 섰다. 내려가는 계단이라 불편한 건지, 뭔지. 그의 자존심으로 힘드냐같은 소리를 하면 분명 좋은 기분이 물거품이 될 거라 생각한 에스더는 별달리 말도 안 하고 기다렸다. 그때였다. 퀴아나가 에스더를 바라본 건. “…왜?” “잠깐.” 눈을 깜빡거리면서 숨을 죽였다. 피부에 바짝 밀착한 흰 장갑 낀 손이 에스더의 뺨을 스쳐 지나갔다. 에스더는 어깨를 움츠렸지만 퀴아나의 목적은 그 뒤에 있는 것인지, 등 뒤에 있는 돌벽을 만졌다. 퀴아나와 돌벽을 번갈아가며 살펴보더니 계단을 한 보만 내려 몸을 피했다. 에스더도 돌벽을 조심히 만지며 눈썹을 까딱였다. “왜 그러는데?” “여기서 바람이 불어와.” “그게 뭐 신기하다고 그러니. 고성이라 바람이 새는 거겠지.” “온풍이니까 그렇지.” 이 겨울에? 돌벽에서? 호그와트에 난방시설이라고 해도 마법 지팡이로 보온 마법을 걸던가, 난로를 떼던가 할 테지만 이런 나선 계단 통로까지 그런 수고를 들일 리 없었다. 그렇다고 이 아래 주방이 있는 것도 아니거니와, 다른 교실이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에스더도 그제야 장갑을 벗고 벽을 만지기 시작했다. 퀴아나의 말처럼 미세하게나마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한 평생 겨울 밖에 보지 못한 에스더는 그런 바람을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장치에 의해서 밖에 느껴본 적이 없었다. 벽 안에 무언가가 있다. 그건 어떤 장치일 수도 있을 테지만 그렇다면 다시 원래대로 돌려놓으면 그만이지 않나? 무심코 돌아본 뒤에서 퀴아나와 눈이 마주쳤다. 항상 지루하기 짝이 없다는 듯 감겨 있는 보라색 눈. 한심해하는 것을 제외하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알 수 없는 그 깊이를 모르는 보라 안에서 처음으로 에스더는 퀴아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라는 확신을 느꼈다. 두 사람은 지팡이를 꺼냈다. 우아하게 휘둘러지는 지팡이는 겨울 공기와 마찰하여 휙 소리가 났다. 순간 눈발이 이 내부까지 들어왔을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들어왔다. 에스더는 제 눈 바로 앞에서 눈 결정을 똑똑히 보았다. 내리쬐는 햇살과 안에서부터 불어오는 더운 열기로 금세 사라져버리고 말았지만……. 그 안에 있던 것은 만연한 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