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노미야 유아 | 글 커미션 (하트메모 스포O)
©키나님

짙은 혈향이 만개한 공간에 침묵이 감돈다. 조금 전까지 치열한 전투가 오가던 장소임에도 그곳에 발 딛고 선 것은 오로지 두 사람뿐이었다. 사기노미야 유아가 낮은 웃음을 흘렸다. 분홍빛 시선은 언뜻 붉음으로 점철된 채였는데, 그럼에도 그 안의 사랑 덩어리만은 영원을 품은 채라서.
“……당신,”
떨리는 목소리는 퍽 익숙한 자의 것이었다. 어깨부터 갈비뼈 언저리가 도끼에 의해 완전히 짓이겨진 형상은 빈말로도 괜찮다 포장할 수 있을 것은 못 되었다. “결국 이럴 거였으면…….” 여러 감정이 뒤섞인 목소리에, 무츠시로 키리히토와 무어라 대화를 나누고 있던 사기노미야 유아가 그제야 그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생각보다 멀쩡하네, 야와링. 현자의 돌에 회복 속도를 올려주는 효과도 있었던가?”
악의 한 점 깃들지 않은 목소리에 야와라가 미간을 양껏 좁히곤 유아를 노려보았다. 그 기저에 깃든 사고를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라, 유아가 눈꼬리를 휘어 웃었다. 유아는 본디 어절을 내뱉기 위해 고민 같은 것을 할 필요 없는 사람이므로 간극은 짧았다. 유아는 상대의 방향으로 다가갔고, 키리히토는 굳이 그것을 말리지 않았다.
“왜 배신했냐고, 사랑이라는 게 그렇게 중요하냐고 묻고 싶은 표정이네.”
유아의 걸음이 멈춘 것은 야와라를 지나 몇 걸음 뒤, 리키야의 앞이었다. 허리가 반절 이상 잘려 안의 장기를 쏟아내고 있음에도 곧바로 죽지 못하는 것은 오버드가 품은 저주에 가깝겠으나 이곳에서 그런 사실 따위를 신경 쓰는 이는 없었다.
유아는 리키야 앞에 꿇어앉아 상대의 증오와 일말의 후회가 담긴 시선을 마주하다, 이윽고 상대의 머리에 반쯤 걸쳐진 모자를 손에 쥐었다. 피투성이가 된 모자를 집어 들어 그것을 제 머리 위로 가져가는 손길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애초에 우린 목적이 일치해서 일시적으로 함께했던 것뿐이었구……, 설령 우리가 어떤 계약 같은 걸 맺었다 해도.”
로쿠죠 리키야는 무어라 뱉고 싶은 듯 입을 열지만 비져나오는 것은 피가래가 끓는 숨소리뿐. 레니게이드 바이러스조차 치료하지 못할 상처는 분명 존재하므로 절명은 머지않았고, 그것은 꼭 사기노미야 유아의 바람에 가닿아 있었다. 유아는 고작 수십 분 전 상대에게 전해 들었던 문장 몇을 떠올려 보았다. 그중에 유아에게 감흥을 안겨줄 수 있던 문장은 많지 않았다. 그야.
“나한텐 누나가 가장 먼저야. 당연한 거잖아?”
그것은 삶의 대전제였으므로.
대답을 닮은 음성이 흘러나온 것은 야와라가 아닌 키리히토의 방향이었다. 작게 소리 내 웃으며, 키리히토가 야와라의 옆 방향에 시선을 두었다. 텅 빈 공간에는 주인 없는 핏물만이 잔뜩 흩뿌려진 채였는데, 조금 전까지 그곳엔 백색의 소녀가 자리해 있었고 키리히토는 당연하게도 칸나의 죽음에 슬퍼하지 않았다.
“괜찮아, 야와라. 다음엔 칸나도 너도 분명 행복한 일상을 보낼 수 있을 거야. 오모이데님의 본체에 접속하면 사람들의 기억도 조작할 수 있을 테고, 그러면 오늘의 일도 전부 없던 걸로 뒤바꿀 수 있겠지. 전부 다, 덮어버리고…… 새롭게 다음의 오늘을 맞이하자.”
“맞아. 릿킹도 시노농도 유맛치도 야와링도. 결국 전부 다 잊어버릴걸~? 그러니까 조금만 참아. 많이 아프면 야와링도 지금 바로 죽여 줄까? 물론 키리링이 힘써 줘야겠지만.”
“이런 일만 나한테 다 떠넘기는 거야? 뭐, 나야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키리히토의 목소리는 얼핏 다정하기 그지없고 유아는 여전히 말갛게 웃는 채라, 야와라는 문득 억울함에 가까운 감정을 느꼈다. 사다요시 야와라가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 하나 시도는 곧 좌절되었다. 고작 중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바닥에 처박힌 몸이 옆으로 기울어졌다. 시선을 어디에 두어도 참상의 흔적은 사라지지 않으며 그 종류만 뒤바뀐다는 사실이 왜 이리도 원통한지.
죽음의 향이 짙었다. 머리가 총에 꿰뚫린 토키토 유마의 시체는 얼핏 리키야나 야와라의 것보다도 더 온전해 보였는데, 급소가 깔끔하게 꿰뚫린 상처는 말 그대로의 살의를 가감 없이 내비치고 있었다.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제거해야 할 상대……, 이유는 명백했다. 그래서 사다요시 야와라는 더 화가 났다.
닿지 못한 것은 고작 한 발짝. 사기노미야 유아가 있었더라면 그 간극을 채우는 것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란 확신이 사라지지 않던 탓이었다.
그러나 어떤 감정을 품어도 현실이 변모할 일은 없었다. 시간은 되돌아가지 않으며 죽은 자가 되살아난다 한들 그것은 오모이데님이 빚어낸 허구일 뿐. 흐린 정신 사이로 사기노미야 유아의 목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칸나…… 아니, 키즈나도 분명 좋아할 거야. 야와링도 나쨩을 만나고 싶어 했잖아? 내가 꼭 그 꿈을 이뤄줄게.” 나직한 음성은 얼핏 야와라를 위한 자장가라도 부르는 것 같았다.
“웃, 기지도…… 않……, 소리, …….”
우하라 시노부의 목소리에 그제야 유아가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피에 젖은 모자를 쓴 채……, 유아가 시노부의 방향을 돌아봤다. “맞아, 웃기지도 않는 소리는 슬슬 그만해야지. 이제 정말 누나를 만나러 가야 하니까.” 그 낯에는 선명한 행복감만이 일렁이고 있었다. 남은 한쪽 눈의 기능조차 잃은 시노부는 유아의 낯을 볼 수 없었으나 상대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유추하는 것은 그로선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시노부는 무어라 더 뱉으려 하나, 결국 입 밖으로 낼 수 있던 것은 핏기가 섞인 기침 소리뿐이었다. 꿰뚫린 폐는 온전히 숨을 내쉬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고 죽음은 시시각각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애초 승자와 패자가 나뉘었던 순간부터 상황은 명백했다. 유아나 키리히토라 해서 꼴이 멀쩡한 것은 아니었으나 이곳에 쓰러진 네 사람에 비할 바는 못 되었고, 에메랄드색 수정이 밝히고 있는 공간은 이 순간만은 오롯이 붉었다.
“그래서…… 회포는 슬슬 다 푼 건가?”
수정───오모이데님의 신체 앞에 선 키리히토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는 축 늘어져 더는 말을 듣지 않는 팔에서 피를 뚝뚝 흘리고 있음에도 꼭 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린아이처럼 상기된 낯을 한 채였다. 채근의 원인도 불편함이 아닌, 조금이라도 더 빨리 바람을 이루고 싶다는 설렘일 것이란 사실을 유아는 어렵지 않게 짐작했다.
“미안, 미안. 그래서 다음엔 뭘 하면 된다고?”
“이제 오모이데님의 신체를 파괴할 거야. 그것으로 연단의 의식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갈 테니, 칸나가 사라질 일도 없겠지. 그다음엔 오모이데님의 본체를 찾아 직접 엑세스하면 돼. 칸나의 신체에 키즈나의 영혼을 집어넣으려면, 시행착오는 조금 거쳐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이제 방해꾼도 전부 사라졌으니 문제는 없겠지. 도련님의 좋은 머리도 빌릴 수 있을 테고.”
“그럼 우리 누나는~?”
“솔직하게 이야기하자면, 이미 육체도 영혼도 멀쩡할 그것에게 내가 해줄 일이 있나 싶긴 한데. 보다 온전한 형태로 되돌리는 거야 가능하겠지만…… 너는 생전의 기억을 전부 가지고 있는 나나히메 카오루를 바라는 건 아니지 않아? 난 네 목적이 현상 유지라고 생각했어.”
“응, 그렇지. 그래도 키리링이라면 더 좋은 방법을 알고 있을까 싶어 물어봤는데…… 역시 그 이상은 무리인가.”
“황천귀환자의 수를 조절하면 네 누나가 밤마다 괴물이 되어 산으로 갈 일도 없어질 거야. 그건 황천귀환자들이 너무 많아졌을 때 벌어지는 현상이니까. 그것 말고는……, 글쎄다. 당신의 근본적인 욕망이 뭔지를 모르겠어서, 그걸 이룰 수 있는 법도 당연히 모르겠네. 널 사랑하는 나나히메 카오루라도 만들어 주길 바라?”
“그건 됐어. 사랑은 그런 방식으로 얻어선 아무 의미 없다구. 그러니까 누나의 마음은 내가 알아서 할게.”
대화 사이 또다시 하나의 생이 꺼진다. 저편에서 무어라 얄팍한 목소리가 들려 왔으나, 사기노미야 유아와 무츠시로 키리히토는 그런 사실 따윈 신경 쓰지조차 않은 채 녹색의 수정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럼.” 키리히토가 총을 겨누었다. 섬의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믿고 바랐던 신의 파편을 향하여.
간절한 마음과 기원이 담겼다는 관점에선, 그것도 일종의…… 신에게 바치는 기도에 가까웠을지 몰랐다.
“당분간은 같이 움직이겠네, 도련님.”
“응, 응~. 키리링은 말이 잘 통해서 좋다니까.”
한쪽 팔이 완전히 기능을 잃었을지언정 남은 한 팔만으로도 총구는 당길 수 있다. 표적은 이리도 거대하다. 따라 키리히토는 전투가 끝난 뒤에도 총만은 계속 쥐고 있었고 그것은 모두 이 순간을 위해서였다.
그 모든 과정을 넘어, 탕. 고작 한 발의 간결한 총성이 울렸다.
무언가가 깨져나가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다만 순식간에…… 에메랄드빛의 수정 파편이 사방으로 산개했다. 오모이데님이 저런 행위로 망가져 버릴 리는 없고 기적의 근원은 여전히 건재하므로, 그것은 새로운 비극의 장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그럼…… 시작해 볼까.”
남자가 웃었다. 기대가 한가득 담긴 낯은 타인의 비극을 자신의 소망을 위해 얼마든지 소모할 수 있는 자의 비원을 담아내고 있었다.